본 유적은 유구는 통일신라~조선시대의 석축유구 1기가 확인되었다. 유물은 총 8점으로, 석
축유구에서 통일신라시대 중판타날 수키와편·인화문 개편·완 구연부편·철도자편·凹형철기, 조선시
대 백자 발 구연부편·암키와편이 출토되었다. 석축유구의 조성시기는 유구 아래의 구지표층에서 출토된 중판타날 수키와편을 통해 볼 때,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비정할 수 있다. 또한 석축유구 상부에서는 7·8세기 때부터 조선 전기까지의 유물이 함께 출토되어 그 존속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.
석축유구의 성격에 대해서는 인근 방내지 안에 위치한 ‘長興寺’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겠다. 본 유
적에서 남서쪽으로 약 40m 이격한 ‘장흥사지’가 수몰되기 이전 바닥에는 주춧돌 및 기와조각이 많이 널
려 있었다고 전한다.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이곳에서 수습한 ‘月生山長興寺’銘 기와가 소장되어 있는데, 이 명문와를 근거로 장흥사로 비정하고 있다. 또한 『新羅古瓦の 硏究』와 『韓國寺刹事典』에는 ‘장흥사’에 관해 ‘西面 芳內里字寺谷 塔址礎石散在’, ‘在慶尙北道慶州郡西面芳內里 塔址礎石 散在’라고 각각 기록되어 있다. ‘月生山’은 단석산의 이칭(異稱)으로서, 단석산은 조선 전기부터 사용된 명칭이고, 그 이전에는 월생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.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『해동지도』·『비변사인 영남지도』·『경주도회 좌통지도』등에서도 ‘장흥사’의 존재가 확인된다. 따라서 장흥사는 이 일대에서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.
본 유적은 과거 장흥사로 통하는 길목이었던 나태고개(목고개)에 입지하고 있으므로 석축유구가 장흥사의 사역 내 부속시설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따름이다. 다만, 장흥사의 창건연대가 불분명하여 향후 장흥사지 출토 명문와를 실견한다면 두 유적의 연대 및 관련성 검토에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.